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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비는 여흥 민씨로 여주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자영이라고 하는데 확실치는 않다.

 

숙종을 두고 장희빈과 삼각관계였던 인현왕후를 배출한 민씨가였다

 

아버지 민치록은 서인계였고 세도정치기인 철종 때

 

음서로 관직에 오른 어느정도 명망있는 집안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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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8살때 서울 집으로 이사오게 되었다. 

 

민비는 흥선 대원군의 아내 민씨와 두터운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대원군 아내 민씨는 고종의 정실로 민비를 추천하게 되는데

 

대원군은 가문적으로는 그다지 꿀리지 않으나

 

안동김씨 같은 외척 세력은 없는 민비의 가문 배경이 마음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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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영은 16세의 나이에 왕비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그런데 고종은 상궁 출신의 궁인 이씨를 총애하여 민비는 냉대했다.

 

궁인 이씨가 아들 완화군을 낳자 대원군은 세자로 책봉하려 하는데

 

이는 민비마저 견제하려는 대원군의 생각으로 추정된다.

 

이때부터 민비와 대원군의 사이가 틀어지게 된다.

 

이후 고종을 유혹한 민비는 아들을 두 명이나 낳았지만 모두 요절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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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비는 민씨 세력을 서서히 형성하여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였다.

 

이씨의 사촌보다 민씨의 팔촌이 낫다는 말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외세에 대한 정치적 입장이나 경복궁 중건 등으로 인한 대원군의 실정이 거듭 됐다.

 

왕의 친정이라는 시대적 요구를 증폭시키고 있었기에 이를 적극 이용하려 했다.

 

마침내 1873년 고종과 민비는 최익현이 대원군의 실정과 정책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리게 하여

 

고종 친정을 선포함으로써 대원군을 권력의 중심에서 축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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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년 강화도 조약의 수모를 당하자 개화파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민비와 고종은 개화 정책을 실시하여 별기군을 창설하게 되는데 

 

지원이 빵빵한 별기군과 달리 급료를 13개월이나 밀렸던 구식 군인들이

 

모래와 겨를 섞은 쌀을 받자 불만이 터져 1882년 임오군란이 터진다.

 

민비는 궁궐을 탈출하여 장호원에 은거하였고 임오군란을 계기로 일시적으로

 

정권을 되찾은 대원군은 민비가 죽었다고 선포하고 국장까지 치르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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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민비는 청나라에 지원을 요청하도록 하였다.

 

청나라 군대의 출동으로 대원군은 청으로 압송되었고 민비는 궁궐로 돌아왔다.

 

이때부터 자신의 안전을 위해 권력에 대해 지나치게 집착을 보이기 시작했다.

 

궁궐에서 굿을 하거나 명산대천을 찾아다니는 등 국고를 낭비하기 시작 했다.

 

국가 예산의 30% 정도를 민씨 일가의 예산으로 쓰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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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응딩이에 빌붙어 급진적 개혁은 원하지 않아 개화파의 불만을 샀고

 

일본 차관을 못 빌려서 입지가 좁아진 개화파는 1884년 갑신정변을 일으킨다.

 

그리고 1894년 동학농민전쟁때 갑신정변의 텐진조약으로

 

청군과 일본군이 개입하게 되는데 이는 청일 전쟁으로 번지게 된다.

 

일본이 승리했으며 요동 지역을 할양 받는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러시아가 삼국간섭을 주도하여 보상금을 받게되고 무산 되었다.

 

이를 본 민비는 러시아 응딩이로 갈아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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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조선의 침탈의 방해요소였던 민비를 제거하고자 하였다.

 

1895년 10월 8일 새벽 경복궁 안에 있는 건청궁의 옥호루에서 민비는

 

난입해 들어온 일본 낭인들의 손에 처참하게 시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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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신마저 향원정의 녹원에서 불태워졌다. 이것이 바로 을미사변이다.

 

"나는 조선의 국모다"하고 당당히 맞섰다는 각본도 있지만

 

궁녀들의 복장을 하고 숨어 있다가 발각 됐다는 이야기가 있다.

 

일본에 왕비 살해의 원한을 갚자는 을미의병이 일어났다.

 

그런데 워낙 민비의 수탈이 심해서 죽은게 슬프기 보다는

 

일본인 손에 죽은게 열 받은게 가장 큰 원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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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군은 이 틈에 잠시 정권을 되찾는 듯 하였지만

 

고종이 러시아 공관에 안전을 의탁하는 아관파천을 행함으로써 곧 실각하였다.

 

민비는 시해 직후 대원군에 의해 폐위되어 서인으로 강등되었다가 같은 해 고종에 의해 복호되었고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로 즉위하면서 명성이라는 시호가 내려지고 황후로 추봉되었다.

 

장례는 죽은 지 2년 만인 1897년에 가서야 국장으로 치러졌으며 홍릉에 안장되었다.

 

요절한 두 아들 다음에 낳은 셋째 아들이 마지막 임금 순종황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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